올림피아 칼라 선버그

4세기 중반, 부유한 기독교인 부부에게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 쪽 고모의 이름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올림피아스라고 지었다. 이 고모는 한 때 황제와 약혼한 적이 있었던 강력한 여성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안디옥 출신의 그리스 귀족 여성이었으며, 이 도시는 사람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곳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로마 제국의 권력 중심에 있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기독교가 받아들여지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대가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올림피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양육되어졌으며, 이 진리는 그녀의 평생 동안 그녀에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슬프게도, 그녀는 어린 나이, 아마도 10대 초반에 부모를 모두 잃었으며, 그녀는 부유하지만 홀로 남겨진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18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의 완벽한 시장(시장)이었던 네브리디우스와 결혼했다. 네브리디우스는 올림피아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으며, 결혼 후 2년 만에 사망하여 그녀는 과부가 되었으며, 전체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부유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폴 에서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걸친 재산을 소유했다. 이것은 황제에게 큰 관심을 가져주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움이 되기 위해 그는 그녀를 그의 친척 중 한 명에게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남자와 함께 살기를 원하셨다면, 그는 나의 첫 남편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독신의 삶과 교회를 위한 봉사의 삶에 자신을 헌신했다.
황제는 그녀의 응답에 너무 분노하여 그녀의 모든 재산과 부를 몰수하여 그녀가 30살이 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믿음을 굳게 해주었으며, 그녀는 냉소적으로 황제에게 그녀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이 그녀에게 축복이며, 황제가 이 모든 것을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좌절한 황제는 그녀의 재산을 돌려주었지만, 이것은 그녀의 삶의 새로운 시기를 시작하도록 했으며, 그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그 시대의 위대한 교부들에게서 지혜를 구했다. 그들 중 하나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 중 한 사람인 니사의 그레고리였으며, 그는 삼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니케아 신조를 알리는 데 도움을 준 신학자였다. 그가 그녀에게 《아가서 주석》을 헌정했을 때 그녀는 아마 이 신학자의 발 끝에서 배우고 있는 여전히 젊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이 소녀의 삶의 무엇이 그토록 위대한 신학자로 하여금 자신의 중요한 신학저서를 한 젊은 여성에게 바치도록 이끌었을까? 아마도 그는 그녀 안에서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예수에 대한 사랑을 보았을 것이며, 이는 그녀의 삶이 바로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당시 교회의 규율은 한 여성이 과부이거나 독신이고 60세가 지난 경우에 여성집사로 안수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올림피아는 30세의 나이에 안수받았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매우 컸다.
올림피아는 위대한 자선가이자 교회의 후원자가 된 수많은 여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매우 젊은 여성들이 나이 많은 남성들과 결혼함에 따라, 교회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한 자원들을 관리하는 일은 종종 과부들에게 맡겨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올림피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순례의 여정을 떠났는지를 헤아릴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그녀의 집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그 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고 휴식을 취했다. 그녀는 도시의 빵 공급을 감독하여 모든 사람에게 항상 충분한 양식이 돌아가는지를 확인했다. 그녀는 매우 관대했으며, 육체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깊이 돌보았으며, 병원, 고아원, 수도원들을 건설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교회 옆에 자신의 수녀원을 지었다. 올림피아는 그녀의 노예였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왕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신과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선언했다.
나중에 그녀는 위대한 설교자인 존 크리소스톰과 친밀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올림피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존이 올림피아에게 쓴 남아있는 편지들에서 나온다. 그는 때때로 그녀의 기부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의도에 찬사를 보내지만, 그녀의 선물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 하며, 이미 부유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있으며, 이는 돈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이 쓸모 없는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그녀의 재산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되어져야 할 것과, 하나님은 그녀에게 재산이 분배되어지는 방식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고 말했다.[1]
결국 올림피아는 그녀가 사랑하고 후원했던 이 위대한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그녀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자신의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이 그녀가 사랑하는 구세주를 위해 더욱 큰 일을 하도록 그녀에게 더욱 자극을 주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주 듣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의 저술에서 그 이야기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 살펴보면, 역사 속에 숨겨진 여성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지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주 열심히 살펴보면 그러한 이야기들이 수세기에 걸쳐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또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올림피아’ 들을 간과하지 말자.
[1] Sozemen, Ecclesiastical History, Book VIII,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