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포용: 천국을 맛보는 모임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 요한계시록 7:9–10
글로벌 교회의 리더로서 나의 상상은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장면에 사로잡혀 왔다.
계시자 요한의 마지막 때에 대한 위대한 비전에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한 가지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도록 한다. 이 듣고 보는 일이 처음 일어나는 것은 4장과 5장의 계시적 환상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그 장면에서 계시자는 하나님의 큰 보좌의 방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일곱 인으로 봉한 큰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있다. 요한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그 봉인들을 열고 그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합당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울기 시작한다. 이 환상의 대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이 두루마리가 역사에 대한 펼침 자체라는 것이다. 그 두루마리와 봉인들이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의도하고 바라시는 곳으로 그 역사를 가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요한에게 주어진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 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역사를 가게 할 합당한 사람은 없다.
이 확인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세상과 교회에서의 리더십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역사를 가게 할 힘이나 능력을 가진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지도자는 없다.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계시록의 기자는 당연히 울기 시작한다. 만약 이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인도할 수 있는 합당한 사람, 능력의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 백성이다.
그러자 한 장로가 요한의 눈물을 막고 울지 말라고 말한다. 합당한 사람이 한 명 있기 때문이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었다. 그는 합당하다. 그는 봉인들을 열고 그 두루마리를 펼 수 있다. 이것이 요한이 들은 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유다의 사자가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곧 그는 다른 것을 보았다. “나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보좌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노라. ” (5:6) 요한은 사자에 대해 들었으며, 그리고 다음에 바라보는 가운데 이 어린 양을 보았다. 상당히 명백한 신학적 언어로 말하면, 요한이 보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시다.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시어 이제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올리우신 분이다. 그는 합당하다. 그는 그 두루마리를 펼쳐서 역사를 아버지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몇 장을 지나서 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대조가 다시 한 번 일어난다. 어린양에 의해 봉인들이 열려진 후, 6장은 이 역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게 될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의 끝까지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역사는 전쟁, 전염병, 기근, 심지어 죽음과 같은 도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6장은 심각한 질문과 함께 끝난다. 역사의 도전들의 한가운데서 누가 능히 설 수 있을까?
7장에서 요한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대표하는 144,000명이 구속을 받아 서게 될 것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지파에 속해 있는 요한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상징적인 언어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분의 목적을 따르는 사람들은 홍해를 통과한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내할 뿐 아니라 역사의 도전들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계시자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것을바라보고 또 보고 있다. 그는 그 누구도 셀 수 없는 모든 지파와 나라와 언어에 속한 큰 무리를 보고 있다. 그들은 큰 군대처럼 모였으나 다만 그들의 손에는 칼이 아니라 종려 가지들이 있어서 그것을 흔들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 그들은 세례식의 흰 옷을 입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진 그 방식을 보여준다. 그 후반부의 환상에서 우리는 심지어 이 그룹이 어린 양의 생명 그 자체로 특징지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거룩한 하늘의 도성 그 자체와 같이 어린양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비추는 것이다.
계시자 요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요한이 듣고 있는 것을 통해 정보를 얻기를 원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보고 있는 것들로 우리의 마음과 영과 혼이 사로잡히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알고 있으며, 거룩함과 소망에 대한 동일한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세계적이고 다양하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무리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있다.
나사렛교회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가 함께 모이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함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조직해 온 기독교 교단들은 별로 없다. 효율성과 언어, 문화적 차이등에 대한 정당한 이유 때문에, 다는 아니더라도 많은 교단들이나 운동들이 제휴는 맺고 있지만 서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국가적 또는 지역의 지도자들로 교회를 조직한다. 나사렛 교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세계의 회중들, 연회, 지구가 영적으로나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나 대표성에 있어서도 서로 관련되고 묶여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나사렛교회를 구성하는 (현재) 165개 세계 교회를 한 권위의 우산 아래 모이도록 한 결정은 거의 50년 전에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내려졌다.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요한이 그의 큰 계시의 환상에서 본 종말적 백성들을 지금 반영하는 것으로 구체화 되기를 원했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주일 저녁 교회 모임을 마친 후에 종종 바스킨 로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31가지 맛의 아이스크림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는 했다. 현재 대부분의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배스킨 로빈스가 처음으로 그 작은 샘플링 스푼을 사용해 손님들이 주문하기 전 한 두 가지 맛을 미리 시식해 볼 수 있도록 한 회사였다. 나는 그 작은 분홍색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사렛교회는 요한계시록 7장의 작은 분홍색 스푼이 되어야 한다. 매주 우리가 모여 192개의 다른 언어로 주님을 예배할 때(아시아의 해돋이부터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의 해질 때까지), 우리는 요한이 역사의 도전들을 극복하고 보좌 주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어디를 가든 어린 양의 삶을 반영하는 것을 본 거룩한 군중의 예배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여전히 전쟁과 전염병, 기근, 죽음에 직면한 깊게 분열된 세상에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모이게 되고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세상의 목자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 소망으로 함께 서게 된다(7:17).
T. 스콧 다니엘스는 나사렛교회의 국제총회 감독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