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웨슬리

찰스 웨슬리

1700년대 중반, 옥스퍼드 대학의 한 젊은 학생이 사소한 일들에 첫 해를 낭비한 후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그 다음 년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 세 명의 젊은 학자들을 설득하여 나와 함께 대학 과정에 규정되어 있는 학업 과정을 준수하기로 작정했다. 이것은 나에게 '규칙을 따르는 자(Methodist)'라는 무해한 별명을 얻게했다.” 

            그가 바로 찰스 웨슬레였다. 그가 말한 동료들은 윌리엄 모건과 로버트 커캄이었다. 대학 규정은 학생들이 그룹을 만들어 학문적, 종교적 활동에서 서로 지원하도록 장려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무시되고 있었으며, 이 세 사람이 그 정책을 존중하기로 결정했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그 결정은 사상 최초의 감리교 단체인 '거룩한 클럽'을 탄생시켰으며, 그들은 세계 최초의 감리교인들이 되었다. 

            찰스는 엡워스의 영국국교회 사제였던 사무엘 웨슬리와 그의 아내 수산나의 막내 아들이었다. 1707년 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두고 태어난 찰스는 많은 누나들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8세에 그는 남쪽에 있는 런던으로 보내져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의 큰 형 사무엘 주니어가 그 학교의 학감이었다. 1727년에 그는 옥스포드에 들어갔는데, 또 다른 형제 요한은 그 학교를 막 떠날 때 였다.

            '거룩한 클럽'은 찰스 웨슬레가 참된 믿음을 맹렬히 찾아가기 위한 무대가 되었다. 학업, 신앙적 헌신, 가난한 사람들과 수감자를 위한 선한 일들이 이 클럽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그 모임은 서서히 자라났다. 1729년에 요한 웨슬리가 옥스퍼드로 돌아왔을 때 찰스는 그의 형에게 이 그룹을 지도해 줄 것을 설득했다. 그들의 인생은 그날 이후로 서로 연결되었다.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싶은 갈망에 이끌려, 웨슬레 형제는 영국령 북미주에 있는 조지아 식민지를 세운 제임스 오글소프에게 선교사들로 식민지 현장에 가는 것에 대해 문의했다. 그들의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찰스는 오글소프의 개인 비서로 임명되었다. 1735년 말이 되고 이제 그들이 출발하기 몇 주 전에 영국국교회 런던교구 감독 에드먼드 깁슨은 찰스를 영국 교회의 사제로 안수했다.

            선교사들로 가졌던 웨슬레 형제의 야망들은 성취되지 못했다. 비서 업무에 부적합한 찰스는 병이 났으며 우울해졌다. 1736년이 끝나기 전에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요한과 한 젊은 여성과의 사이에 있었던 복잡한 관계와, 그의 종교적 엄격함에 대한 보편적인 반대의 분위기로 요한도 조지아에서의 사역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항해에서 웨슬레는 처음 독일의 경건파인 모라비안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게 됨”과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친밀함으로 이야기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강하고 생동감 있는 믿음은 요한과 찰스가 종교에 대해 취한 청교도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런던으로 돌아가서 찰스와 요한은 모라비안 사람들과 접촉을 이어갔다. 그 중 한 사람인 피터 볼러는 이 형제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관계를 통해 웨슬레 형제는 1738년 5월에 각각 복음적 은혜를 경험했다. 찰스는 21일에 토마스 브레이의 집에서 기도하면서 경험을 했고, 요한은 24일에 이 후 유명해진한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신앙 모임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웨슬리안 부흥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거룩한 클럽의 회원인 조지 휫필드는 야외의 넓은 열린 공간에서 대중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이 형제들에게 가르쳐 줌으로 기존의 격식을 갖춘 사역 에티켓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찰스는 1739년 6월 24일에 무어필즈에서 10,000명의 군중에게 설교 했다. 곧 웨슬레 형제는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전역에 감리교 모임을 만들어 나갔다. 구역회 모임들, 야외 설교, 평신도 설교자들의 사용이 이 운동의 특징이었다.

            찰스 웨슬리의 남은 삶은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749년 사라 그윈과 결혼할 때까지 그는 감리교 운동을 위하여 영국 제도를 두루 다니며 설교했다. 결혼 후 부부는 대서양 항구 도시이자 감리교 운동의 주요 본거지인 브리스톨에 정착했다. 찰스는 이후 22년 동안 브리스톨 지역의 감리교 모임들을 지도했다.  

1771년 찰스는 아들들의 장래를 위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는 런던의 감리교 모임들을 감독했으며, 브리스톨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 1778년 시티 로드에 새 예배당이 지어진 후, 찰스는 그가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이 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찰스는 평생에 걸쳐 실천하는 운문 작가였다. 이러한 은사는 요한과 이 형제들의 아버지, 그리고 찰스의 아들들에게도 있었다. 회심 후 찰스 웨슬리가 지은 시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신앙적인 것이었다. 은혜와 믿음, 성결이라는 큰 주제들이 많은 시 구절들을 관통하고 있지만, 그는 또한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시를 쓰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몰드윈 에드워즈가 썼듯이 찰스 웨슬리는 이 시들과 찬송가를 통해 “보편적 교회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찬송가 출판은 웨슬레 형제들이 남긴 위대한 협력 사역중 하나였다. 찬송가와 신성한 시(Hymns and Sacred Poems, 1739)는 널리 배포되었으며 심지어 그 다음 해에 미국에서도 출판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시대가 지나며 그의 발걸음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큰 노력은 1780년 찬송가, 도《감리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위한 찬송가 모음》이었다. 그 안의 525편의 찬송가 중 절반 이상을 찰스가 썼다.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지금까지 출판된 찬송가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공동기도서》와 함께 영국에서 출판된 가장 중요한 두 종교적 경건 서적으로 꼽는다.

시인이자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설교자였던 찰스 웨슬리는 1788년 3월 29일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인 그의 삶은 여전히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있다. 

스탠 잉거솔은 나사렛 기록보관소의 전 이관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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