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데비 솔터 굿윈

사라 데비 솔터 굿윈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안에 사라가 조용히 들어가 있지만, 그녀가 계속 조용히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사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해를 많이 받았으며 가장 연구되어진 여성들 하나일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에게 있는 최악의 특징들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완고함, 복수심, 지배심 등이다. 그녀가 선택한 일들로 인해 많은 나쁜 평가들을 받았는데, 특히 그녀의 선택들이 가져온 역효과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여인들보다 성경은 사라에게 많은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에 유일하게 언급되는 아내는 사라이다.

            부분을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사라가 우리의 부정적 판단을 받아야 그런 사람으로만 들리는가? 대신, 우리는 하나님이 사라에게서 무엇을 보셨는지를 찾아야하지 않을까?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보시고 계시는지 알아야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의지적이고 지배적인 여인은 처음에 사래로 태어났다가 후에 사라가 되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그리고 약속을 위한 여인으로 형성되어져 갔다..

사래로 시작하다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여성의 이야기 초반에서 그녀에 대해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불임이었으며 아름다웠다. 불임이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문화 속에서는 아마도 그녀의 숨겨진 죄에서 문제가 비롯된 것으로 간주할 있었다. 불임은 사라를 아름다움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곳으로 그녀를 위치 시켰다.

자신의 자식을 낳지 못하자 사라는 상속자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우리가 일에 대해 민망히 여길 있지만, 당시 행위는 합법적이고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졌었고, 하나님은 후에 그것을 금지시키실 것이다(레위기 18:18).

선택들의 어떤 것도 시리가 찾던 안전을 그녀에게 제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바랐던 지배력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밤을 지냈던 자신의 여종을 그녀는 가혹하게 대했으며, 여인 사이의 거리는 결정 이후 결코 다시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통제를 벗어난 여인 이상을 보고 계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녀가 무엇을 있거나 없는 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싶어하는 상처받은 여인을 보고 계셨다.

사라가 취약해 있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라를 위해 나타나셨는지를 보여주는 가지 사건이 있다. 첫째, 기근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위협했다. 그들은 먹을 것이 풍부한 이집트로 이동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라에게 그의 누이 역할을 하라고 요청했다(창세기 12:11-13). 이것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진리의 전부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이복 누이였다. 그들은 같은 아버지인 데라를 두고 있었지만, 어머니들은 서로 달랐다. 아브라함은 진실의 절반을 말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사라가 절반의 아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로는 그녀를 취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라를 자신의 후궁으로 추가했다.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질병을 가져오셨을 , 바로는 화살들이 아브라함으로 향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해 추가 종들과 가축들과 함께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다.

            아비멜렉왕의 통치 하에 있던 그랄에서 일이 다시 일어났다 (창세기 20:1-2). 이번에는 하나님이 속에서 왕에게 말하시면서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다시 한번 사라는 불법적인 결합으로부터 벗어날 있었다. 경우 모두,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항상 사라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라로 이름을 지으시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만나셨으며, 그의 이름을 높이 계신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람에서 많은 나라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라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그녀의 출생 이름인 사래, 왕자에서 사라, 공주로 바꾸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그녀가 파트너가 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다.

이제 사라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약속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그녀의 통제하는 행동이 얼마나 효과가 없으며 파괴적이었는지를 있는 기회를 주셨다.

사라가 웃었을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면, 방문자의 사건은 의심을 해결했다(창세기 18:1-15). 아브라함에게는 사람들이 그저 잃은 여행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사자들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사라는 그녀의 장막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으며, 그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에 대한 약속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웃었다. 당신 같아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이삭이 태어났을 , 사라는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게 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와 하나님이 마치 농담을 나누는 같았다. 그녀가 결코 일어날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일이 모든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으며, 사라에게 자신의 지배력을 통해서는 결코 확보할 없는 자리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에서 무엇을 이루어 가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 자신의 계획들에 투자했기 때문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사라의 이야기는 상기시켜준다. 그분의 번째 바램은 우리가 항복의 유익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만들어 나가시는 것이다. 이렇게 , 우리는 지배보다는 순종을 택하고, 자기 의지보다는 순복을 택하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시며 우리를 형성해 나가기를 원하시는지 계속 찾아가고 있다. 사라처럼 우리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복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를 형성하게 되며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과 안전을 받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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