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당신이 (조상의 가계를 찾아 주는-역자)ancestry.com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 당신 조상들 중 놀라운 관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될 것이며, 그 중 일부는 다소 충격적인 것들일 수도 있다. 우리 중 일부는 우리의 신학적 가계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을 발견할 때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실사 로마 카톨릭교회에 있어서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다. 요한 웨슬레는 아퀴나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이 후기 웨슬레안 신학들에 등장할 때도 긍정적인 관점에서만 쓰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신학 가계도에 속해 있다. 아퀴나스는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웨슬레인들은 그에게서 배움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로마와 나폴리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인 로카세카에 있는 가족 성에서 태어났다. 20세의 나이에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가입함으로 그의 부모가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인근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는 파리 대학에 들어가서 그 시대의 주요 신학자 중 한 명인 성 알버트 마그너스 밑에서 공부했다. 아퀴나스는 당시에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또한 그의 방대한 조직신학 작품인 신학 대전과 대이교도대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 덜 알려진 사실은 그가 또한 이사야, 욥, 예레미야, 애가, 처음 54개의 시편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바울의 모든 서신들, 히브리서에 대한 성경 주석을 썼다는 것이다. 그의 전체 작품은 800만 단어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이 엄청난 문학적 생산을 한 곳에서 이루어낸 것도 아니었다. 교회의 종으로서 그리고 수도원 회원으로서 그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한 학자는 그가 약 9,000마일을 걸어서 여행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은 절실한 필요나 질병을 가지고 있을 떄를 제외하고는 말을 타지 않았다).
창조와 하나님의 선하심
요한 웨슬레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전통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인 제이콥 아르미니우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중세 시대의 신학자 중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는 모든 점에 있어서 아퀴나스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퀴나스의 몇 가지 핵심적인 통찰이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의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모든 창조의 동인이자 목표라는 아퀴나스의 주장이 있다. 당신의 넘치는 선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자유롭게 선택하셨으며 또한 당신의 선하심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지시하고 명령하신다.
아르미니우스는 개혁주의의 예정론들을 거부함에 있어서 이 신학적 통찰력을 인용하고 있다. 창조는 선한 것들 사이의 소통이고 선을 향해 질서있게 놓여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설명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을 창조한 것은 저주를 향한 의도를 가진 것이 되며, 따라서 가장 큰 악을 위한 준비가 된다. 이 논쟁은 이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하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아퀴나스에게서 자신의 신학적 성찰에 도움이 된 도구와 개념, 통찰을 발견했다는 사실만 말해도 충분하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레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한 교리가 기독교 전통에서 전례 없는 신학적 서술이라는 근거로 반대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웨슬레안 대유산 grand depositum)과도 중요한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다. 웨슬레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도 마태복음 5:48에 있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생애에서의 온전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사랑 안의 완전함이며, 여기에는 죄로부터의 자유가 포함되며, 완전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배도 역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차이점들도 있다. 확신에 대해서 그들의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아마도 가장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교리에 대해 기독교 전통의 다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웨슬레안들은 아퀴나스의 글들에서 앞을 밝히는 선례들을 발견할 것이다.
결론
토마스 아퀴나스는 웨슬레안인은 아니었다. 그의 견해 중 일부는 우리 전통의 신학적 헌신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으며, 그의 통찰력은 전체 교회에 유익했다. 우리도 그에게서 계속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좋은 출발점은 프레드릭 크리스찬 바우어슈미트의 '신학대전 핵심'이 될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려면 요한복음에 대한 아퀴나스의 주석을 라살펴보.
조엘 초프는 켄터키 주 애즈버리에 있는 애즈버리 신학교의 역사 및 조직신학 조교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