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학적 가계도

우리의 신학적 가계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2천 년 동안 가지들을 펼쳐 온 하나의 강력한 오크나무처럼 상상한다면, 이 가지들을 하나씩 세어 보는 것은 마치 그 뿌리로부터 자라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이름을 세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 나무의 뿌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요 (그리스도), 그 줄기는 기록된 말씀이요(성경), 그 가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전 세계의 여러 장소에서 모일 때 듣는 선포된 말씀이라(설교) 할 수 있다다.
 

나사렛교회는 이 가지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것은 더 큰 가지로부터 자라났다. 나무영양사들은 이러한 큰 가지들을 “비계 가지들” 또는 “큰 가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기독교 나무의 많은 가지들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시작이 되는 두개의 커다란 가지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 동교회와 서교회들 – 그리고 서교회의 큰 가지로부터는 종교 개혁을 통해 뻗어 나온 수 많은 개신교 교회들의 가지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사렛교회는 이쪽의 개신교의 가지에서 자라났다.

 

나는 성인 주일학교 반에서 누군가가 “어거스틴은 가톨릭 사람이었나요?”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네 그렇지요, 하지만 그 때는 모두가 그랬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성찰을 통해 얻게된 올바른 대답은 "네, 우리 모두도 그렇습니다"이다. 나사렛교회는 로마 가톨릭은 아니지만, 우리는 가톨릭적이다. 즉 우리는 보편적 교회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둔 많은 가지들 중 하나이다.

 

이번 판 홀리네스 투데이 는 여기에서 다루는 신학자들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제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글들은 여러분의 관심을 자극하고 이 중요한 신학자들과 우리 가지와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하는데에 있다.

 

마크 프리시우스는 성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끼친 깊은 영향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여전히 우리는 타락한 인간 본성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의존에 대한 어거스틴의 진단을 확인한다.

 

조엘 촙이 밝힌 것처럼 위대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우리의 혈통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창조의 근원과 목표로서의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아퀴나스의 강조는 이후 저주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인류의 일부를 창조하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아르미니우스가 거부할 수 있도록 알려 주었다.

클라우스 아놀드는 종교 개혁의 솔라(오직) 구호들을 통해 마틴 루터와 우리에게 있는 관계성에 대해 썼다.

프랭크 무어는 우리가 요한 칼빈에게 얻은 “감사의 빚”에 대해 썼다.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 두 사람 모두 이 신학적 거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키이스 스탱글린은 제이콥 아르미니우스 신학의 핵심 교리에 대해 훌륭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 기사는 우리의 특정한 신학적 유산과 우리의 독특한 가지에 곁들인 “왜”와 “어떻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H. 고든 스미스 3세가 묘사한 “목사 신학자”인 요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생각에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 스탠 잉거솔은 요한의 형제 찰스를 “복음적 부흥 운동의 시인”이라고 묘사했으며, 찰스는 복잡한 신학적 개념들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은혜와 성결의 찬송들로 바꿈으로서 이 부흥 운동의 메시지가 대중들에게 공명되도록 도왔다.

이번 호가 여러분이 우리의 신학적 가계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또 어떻게 우리가 큰 유산의 수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도록 돕기를 바란다.

나다나엘 길모어는홀리니스 투데이》의 콘텐츠 이편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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